김천시 지례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지례면

지명유래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한 지역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상주(沙伐州)에 속했으며 지품천현 (知品川縣)이라 불렀다.

신 라 경덕왕 35년(757년) 개령군에 속하였고 지례현이라 고쳤으며, 고려조에 와서 현종 9 년에 경산부(星州)에 속하였는데 공양왕 때에 감무를 두었다. 지례현의 하현면이라 하여 교촌, 부평. 상부. 하부. 대율. 고념. 거물. 반목. 동산. 현장촌. 동장촌과 상현면에 속한 도곡. 송천. 신평. 관덕. 구수. 고석. 여배 마을이 있었다. 조선조 태종 10년(1410)에 상주에 진영을 둔 독립현으로 현감(縣監)을 두었다.

조선 고종(1896년)때 관제 개혁으로 지례군으로 바뀌었고, 1906년 성주군 증산면을 지례면에 편입시켜 상현면. 하현면. 상남면. 하남면. 외남면. 서면. 하서면. 상북면. 하북면. 외증산면의 열개 면을 관하에 두었다. 1914년 일제 시절에 행정구역 개편 당시 성주목 외증산면 일부였던 상신평. 하신평. 삼곡. 외고. 내고. 울곡. 이전. 해평을 합하여 김천군 지례면이라 불렀으며, 광복 후 금릉군 관할 지역이 되었다.

1994년 1월 법정리로 교리. 상부. 대율. 거물. 도곡. 관덕. 신평. 이전. 울곡. 여배의 10개 이동으로 이루어지며, 행정리로는 교 1리. 교 2리. 상부 1리. 상부 2리. 대율. 거물. 도곡 1리. 도곡 2리. 도곡 3리. 관덕. 신평 1리. 신평 2리. 이전. 울곡. 여배 1리. 여배 2리로 16개 리로 이루어진다.

김천의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김천시에서 남쪽으로 20km 지점의 산간 지방이다.

면 의 서쪽은 부항면을 접하고, 남으로 대덕면과 만나고, 동남으로 증산면, 성주군 금수면 과 경계를 이루고, 동북으로 조마와 어깨를 맞대이고 북쪽으로 구성면과 연결된다. 전답은 대체로 좁게 형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이루고, 감천변을 따라 삼천포 ∼초산선 국도 3번선이 남북을 가르고 있다.

교리와 상부리를 중심으로 면소재지가 이루어졌고, 구 금릉 군내에서는 가장 큰 시가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5일마다 서는 장이 아직 남아 있다. 또한 김천. 거창. 영동. 울곡. 조마. 상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 침략군 제 6진 1만 5천명을 인솔한 고바야가와가 전쟁에 패하여 퇴각하던 중 지례에서 왜적 1,500여명이 소탕된 격전지역이었으며, 1907년 11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1년간 의병과 일본경찰의 교전지로 한말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기도 한다.

지품천현의 지품(知品)이라 함은 깊다 - 짚다에서 비롯한 형태이다. 골이 깊고 물웅덩이의 굼뜸이 깊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교 리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접경한 군사적 요충지여서 신라 경덕왕 때 이곳에 현을 두었다. 지례현 하현면에 속했는데 조선 세종 8년에 향교가 건립되어 행교마, 향교촌, 교촌이라 불리었다. 1914년 부평동까지 병합하여 교리라 하고 김천군 지례면에 편입되었고, 1971년에 교리, 교촌 지역을 교 1리로 나누었다.

면소재지 마을로 관내의 주요 기관이 이곳에 모여 있고, 마을 앞 동편에 삼천포∼초산선 3번 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다. 옛부터 지례장이 5일마다 서서 지례 부항, 대덕, 구성, 증산 등 5개면의 상업 중심지로 역할을 왔고 읍의 형태를 갖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북으로는 교 2리, 남으로는 상부 1리, 동으로는 상부 2리, 서로는 도곡 1리와 접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교리. 행교마. 향교촌. 교촌. 교동(校洞)
    • 이곳은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가 접경한 군사적 요충지여서 신라 경덕왕 때 여기에 현을 두었는데 이 때부터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다.
    • 그 후 조선 세종 8년에 지례향교가 건립되자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행교마. 향교촌. 교촌. 교동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범밧골. 범바우골. 부평(富坪)
    • 교리 1리 북쪽에 있는이 마을은 뒷산에 큰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두 개의 바위가 마을을 향해 있다. 옛날 마을 뒷산에는 큰 호랑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호랑이 세 마리가 이 호랑이 바위 틈에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의 이름을 범바위골 또는 범밧골이라고 했다. 또 이 호랑이 형상을 한 바위의 보살핌이 있어서 마을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고 농사가 잘되어 부유하게 살 수 있다고 마을이름을 부평이라고도 한다.
  • 온평(溫坪). 온팽이. 따슨평. 대촌
    • 조선 고종 18년에 정선전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보고 마을 앞들이 움푹 들어가서 따뜻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온평들이라고 했다. 이에 연유하여 이 마을을 온평. 온팽이. 따슨평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어느 선비가 이 마을 앞을 지나다가 마을 앞 제방에 큰 대추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 것을 보고 대촌이라 한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 대추나무는 없고 지례중상고가 서 있으므로 대촌이라 부르지 않고 온팽이. 온평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상부리

조선 초기부터 자연부락으로 구분되었다.

1914 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부리. 상부리. 현장촌. 동산리를 합쳐 상부리라 하였고 김천군 지례면 소관으로 개편되었다. 1936년 병자년에 현장촌. 동장촌은 수해로 유실되어 들로 변하였고, 상부리. 하부리를 통합하여 상부로 불리었다.

1993 년 1월 1일 분동으로 관리해 오던 남산이 상부 2리로 행정리로 독립하여 나갔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마을 앞 제방 옆의 국도 3번선과 구산(龜山) 사이에 2백호 안팎의 가구가 살고 있으며, 거창과 부항으로 통하는 지례교를 남쪽 끝에서 부여잡고, 북쪽은 교 1리와 어 깨를 맞대고, 동으로는 감천을 건너 거물과 울곡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내고 있다. 한편 김천∼지례. 부항. 대덕. 증산간의 시내버스가 정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되어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상부. 상부리(上部里)
    • 조선 성종 2년에 문략이란 선비가 이곳에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지례현의 현청을 중심으로 위쪽 마을이라고 상부리라 했다. 임진왜란 당시는 상부리. 하부리. 현장촌. 동장촌. 동산리라는 자연부락으로 구분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하부리. 상부리. 현장촌. 동산리를 합하여 상부리라 했다. 다시 1936년 병자 수해 때 현장촌. 동산리는 떨어져 나가고 상부리. 하부리를 통합하여 현재까지 상부리라 불러 오고 있다.
  • 남산(南山). 동산. 동산리(東山里)
    • 옛날 남산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남산이라 하였고 지례현 동현 자리에서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산. 동산리라 부르기도 하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율리

조선 숙종 원년에 조마면 신안 사람인 주봉래가 와서 마을을 개척하였고, 지례현 하현면에 속했다. 1914년 우산배미. 한배미. 웃한매미. 고롱개를 통합하여, 대율리라 하였고 김천군 지례면에 편입되었다. 광복 후 금릉군 지례면 대율리로 불리웠다.

면 소재지에서 울곡으로 가는 동쪽 3km지점에 4개의 자연부락이 산간지역에 흩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상부 2리와 만나고, 북으로는 구성면 금평리와 닿아 있으며, 남으로는 거물과 경계를 이루고, 동으로는 이전리. 조마면 신곡리와 등을 맞대고 있으며 성주로 넘어가는 길목 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한배미. 한밤이. 대율. 대율리(大栗里)
    • 조선시대 조마면 신안리의 주봉래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정착할 당시 이 골짜기 남쪽에 있는 야생 밤나무 숲에서 큰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큰밤, 곧 한밤이. 한배미. 대율. 대율리란 말을 이 마을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고념(古念). 고롱개. 고렴
    • 남평인 문귀봉이란 사람이 조선 영조 때에 행평에서 조마면 삼산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대율리 동쪽에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서 모든 잡념을 버리고 조용히 옛 일을 생각하며 살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 후 문씨 후손들이 고렴이란 말을 이 마을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거물리

1630년 무렵 문필장이란 사람이 임씨. 김씨를 동반하여 입향한 뒤 부자마을이 되라고 금곡동이라 칭했다. 조선시대 고종때 지례현 하현면에 속하였고, 거물리 반목리라고 하였다.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통합하여 거물리로 하였고, 행정 편의상 거물을 1구, 반목을 2구로 나누었다가 1971년 한동으로 통합하였다. 반목은 고려때 큰 학자였던 장지도(張志道)선생이 살던 곳이다.

지 례면 중심부의 산간오지에 거물. 반목 두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3.5km 깊숙히 들어 앉아 있다. 교통이 불편하다. 북으로는 대율과 상부 2리에 닿아 있고, 남으로는 관덕리, 서쪽은 상부 1리, 동으로는 신평 1, 2리와 접하고 있다. 여기 거물이라 함은 자연부락 거무실에서도 드러났듯이 거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성의 거북이나 지례의 거북이가 모두 물신을 숭앙하던 감천의 감(甘)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거무실. 검울. 금곡. 거물. 거물리(巨勿里)
    • 1630년경 문필장이라는 사람이 임씨. 김씨를 동반하여 이곳에 입주해 마을이름을 부자마을이 되라고 금곡동이라 칭하였으나 수 년 후 한 도학자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마을 입구까지 거미가 내려와 줄을 친 형상이라 하여 거무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너무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거물거물하게 보인다고 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바람실. 반목(伴木). 밤나무실
    • 이 마을은 거물 2리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천상봉 밑에 용이 서려 있는 곳이라서 반목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밤나무실은 바람실의 잘못된 이름이며 바람실의 유래는 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바람이 불면 그 느티나무잎이 유달리 나부끼므로 바람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도곡리

1906년까지 지례군 상현면에 속하였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현재의 도곡 2리의 자연부락인 송천. 신평과 통합하여 지례면 도곡리라고 하였다. 1971년 도곡(도래실). 지전곡 (주치밭골). 배나무골. 노주삼을 도곡 1리로 분동하였다.

국 도 3번선 상의 지례교에서 부항면으로 들어가는 군도변에 도래실. 지전곡(주치밭골). 문질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항천이 마을 앞 도로변을 따라 흐르고, 북쪽은 교 2리와 구성면 임평과 접하며 동쪽은 상부 1리. 교 1리와 만나고, 서쪽은 부항면 유촌리에 이어지며, 남쪽은 가는 밭들이 길게 누워 있으며, 도곡 2. 3리와 산으로 맞닿아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도래실. 도로실. 도곡. 도곡리(道谷里)
    • 옛날부터 마을 입구에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와 큰 돌다리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큰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길을 갈때면 이 바위를 돌아서 간다고 하여 도래실 또는 길옆에 있는 마을이라고 도로실. 도곡. 도곡리라 하게 되었다.
  • 주치밭골. 주치골. 주치곡(朱致谷). 지전곡(芝田谷)
    • 조선시대에 충청도에서 살던 이시인이라는 선비가 이육녀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현종 때에 도래실의 돌다리를 건너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다. 북쪽엔 산이 높고 남쪽은 훤히 트여 서리가 늦게 오고 기후가 온화하다. 이 골짜기에 약초의 하나인 자초(紫草)가 많이 나온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주치골. 주치밭골. 주치곡. 지전곡이라 하게 되었다.
  • 문질. 문길. 문길리. 문질리(門質里)
    • 도 래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는 주막이 한 집 있었는데 반은 부항면에 속하고 반은 지례면에 속했다. 저녁이면 두면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놀다가 밤늦게 자기 집으로 돌아 갈려면 지례면과 부항면의 경계선에 있는 주막의 문을 열고 닫는다고 문질. 문길. 문길리. 문질리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송천(松川). 새터
    • 도래실이 생긴 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처음엔 새터라고 했으나, 조선 선조 때에 어느 선비가 이 마을 뒤에 있는 문의산에 푸른 소나무가 무성하고 마을 앞에는 맑은 냇물이 흐른다고 하여 송천이라 부른 것이 현재의 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 가좌(加左). 가잠
    • 이 마을은 신평 서쪽에 있는 가지고개 밑에 있는데, 불교 전성 시대에 합천 해인사와 직지사로 왕래할 수 있는 직통 소로가 이 마을 옆으로 터져 있었으며 그 당시에는 마을 앞에 수백년 묵은 고목이 있었다 한다. 어느날 한 고승과 그 제자들이 해인사에서 일을 보고 직지사로 가는 길에 이 마을 고목 아래서 휴식을 한 후에 일어서면서 고개마루의 길을 가리키며 "가자, 저 고개로!" 라 한 것이 마을의 이름이 되어 가좌마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곳은 다른 마을보다 양잠을 많이 하여 가잠으로 불려졌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관덕리

조선시대에는 지례현 상현면에 속하였고, 1906년 지례현이 지례군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관덕 구수리로 되었다.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지례군이 지례면으로 불리었고 새터. 고석. 원당. 양산 등과 통합하여 관덕리라 하였다. 광복 후 지례면 소속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 소재지에서 남으로 2km 지점에서 동으로 갈려 들어가 2km∼4km 반경에 새터. 활남. 고석. 구수골. 원당. 양산 등의 6개 마을로 산재해 있으며, 새터. 활남은 3호 국도변에서 가까이 있으나, 나머지 부락은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다. 동쪽은 울곡. 신평 2리와 접하고, 북쪽은 거물. 도곡 2리와 닿아 있으며, 서쪽은 도곡 3리. 여배를 건너다 보고, 남쪽 고석산 마루는 증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활람. 활나미. 궁남(弓南). 관덕리(觀德里)
    • 조선 중종 때 김의수라는 선비가 기묘사화를 피하여 궁을산 밑으로 내려와서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뒷산이 활모양을 닮았고, 지례면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궁남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관덕이라 함은 이백년전 지례현감 김락현이란 분이 마을 이름인 활남을 성인의 말 사이관덕(射而觀德)이란 뜻을 인용하여 관덕리로 개칭하였다 한다. 궁을산 능선 밑에 조선 18대 현종의 두 공주의 봉태지(封胎址)가 있는 곳이다.
  • 구시골. 구슬골. 구수골(九水谷)
    • 조선 고종 초에 이추욱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아홉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흘러 간다고 구수동이라고 하게 되었다 한다. 또 돌구유와 구슬이 있다 하여 구시골 또는 구슬골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수 혹은 구시라 함은 구덩이처럼 들어간 곳을 이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신평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외증산면에 속한 상신평. 하신평이었다가 1895년 김산군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례군 외증산면 소속으로 되었다가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삼곡을 합하여 지례면 신평리라 하였다.

광복 후 금릉군 지례면 소속으로 있다가 1971년 삼곡은 분리되어 나가고 신평. 등현을 합해 신평 1리가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7km 떨어진 산촌마을에 위치했으며, 마을 앞으로 지례∼성주간 도로가 나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이전리와 조마면 신곡리와 접하고 남쪽은 울곡리로 이어지고 서쪽은 신평 2리와 어깨를 견주고 있으며, 북으로는 대율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산간 고지대에 속하여 기후가 불규칙하고 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등터. 등현(登峴)
    • 1850년 무렵 김진규라는 사람이 지례면 활남에서 동재의 남동쪽에 마을을 이룩하였다. 그 후 지례면 일부(이전. 율곡. 신평), 성주부 금수면 일부(중리. 은직골. 고방골)를 외증산면이라 칭하였을 때 성주에서 올라 오고 지례면. 조마면에서도 올라온다 하여 이 마을을 등터. 등현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원신평. 새터. 신기
    • 조선 광해군 3년에 화순최씨 유능이란 사람이 조마면 신안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잡목이 우거진 계곡을 개척하여 새터들이라 부른 것이 마을이름이 되었다. 그 후 1906년 행정구역 개편시 새터란 속명을 신평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삼실. 삼곡(三谷)
    •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전 전경만이란 선비가 지례에서 이곳에 들어와 개척하였으며, 마전곡. 성주곡. 후곡의 세 골짜기를 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삼실. 삼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아전내거
    • 지례면 신평 1리는 아전내거(衙前來居)라고도 하는데 옛날 석현면에 근무하던 아전들이 면이 없어지자 이곳으로 와서 살았다고 하기 때문이라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이전리

옛날 진주최씨와 밀양박씨 성을 가진 두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임진왜란 때 사람들이 은신하여 살았다.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외증산면의 소속이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시 불당골. 성암을 통합하여 지례면 이전리라 하였다.

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10km 떨어진 산간지대에 위치해 있고, 김천-조마-성주 간 지방도로가 마을 입구쪽에 시원하게 누워 있으며, 산간오지 속의 평야처럼 마을 앞에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동남쪽으로 길게 돌출되어 성주군 금수면과 접하고, 서쪽은 대율과 신평 1리와 만나고, 북은 조마면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진바실. 진밭실. 이전(泥田)
    • 옛날에 진주최씨와 밀양박씨성을 가진 두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임진왜란때 많은 사람들이 난을 피하기 위해 은신하여 있다가 이 마을에 살기도 했다. 이 마을의 토질이 진흙이고 물기가 많아서 진밭실. 진바실. 이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 해평(海坪)
    • 옛날에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날 때마다 이곳의 지세가 넓은 바다 위에 배가 떠있는 것 같아 보여서 이 마을 이름을 해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울곡리

조선시대에는 성주목 외증산면에 속해 울곡리. 내고리. 외고리라 하였고, 1895년에 김산군에 편입되었다. 1906년 지례군 외증산면 소속이었다가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시 김천군 지례면 울곡리라 하고 지례면 동남쪽으로 길게 돌출되어 있는 산간오지 마을로 면 소재지에서 9km 떨어져 있다. 울실. 내고. 외고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남으로 성주군 금수면과 맞대어 있고, 서쪽은 관덕리와 만나고, 북은 이전리와 인접하면서 조마면. 김천시로 빠지는 지방도로가 열려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울실. 웃실. 울곡(蔚谷)
    • 옛날 이선우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이곳을 개척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개척 당시 마을 뒷산 계곡에서 내려다 보니 지리적 형세가 마을을 감싸 안은 울타리 형상이고 피란처로 최적지여서 마을 이름을 웃실. 울곡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안기터. 내고(內古). 내현(內峴)
    • 옛날 김수남이란 선비가 묵은 터의 안쪽 계곡에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기터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안기터. 내고. 내현이라고 부른다.
  • 바깥기터. 외고(外古). 외현(外峴)
    • 옛날 정기장. 김연태라는 두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기터의 바깥쪽에 위치해 있다고 바깥기터. 외고. 외현이라고 부른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여배리

원래 지례군 상현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속수와 도평(도틀)을 통합하여 지례면 여배리라 하였다. 1971년 속수(속시)와 도평(도틀)이 여배 2리로 떨어져 나가고 여배 1리로 남게 되었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국도 따라 4.5km 떨어져 있으며, 윗마을. 아랫마을로 2개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앞은 감천이 흐르고, 하천 양옆으로 들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은 여배 2리(속수), 서쪽은 부항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대덕면 가례리, 북쪽은 도곡 3리(가좌)마을과 접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너배. 널보. 광촌. 여배. 여배리(汝培里)
    • 조선 선조 때 이영년이라는 선비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 마을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며 마을 앞에 넓은 보가 있다고 널보 또는 광촌이라 불러오다가, 어느쩌군胄?너배를 한자로 대치하여 여배(汝培)로 부른 것이 마을이름이 되었다.
  • 속수. 속시(速矢)
    • 조선조 시절 평택인 박재출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그 당시 관덕리 궁남에서 활을 쏘면 이 마을에서는 떨어진 화살을 거두어 묶었다 하여 속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속시가 잘못 와전되어 속수(速水)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도틀. 도톨. 도평(道坪)
    • 조선시대(연대미상)에 한 길손이 이 마을을 보고 풍수지리학상 돼지 형국이라 하여 도틀. 도톨. 도톨이라 한 것이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그 당시 최 아무개가 농작물을 해치는 산돼지가 많아 덫을 놓아 많은 산돼지를 잡았다고 도틀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 도평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광복되기 전 이현기라는 사람이 마을이 너무 메마르고 과일나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앞으로 후손들이 북숭아꽃처럼 밝고 복숭아 과일처럼 싱싱하게 자라서 큰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도평이라는 이름을 지어 부르게 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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