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대항면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대항면

설화

장계(長溪)다리

직지사 상가 서쪽에 있는 장계다리는 동쪽은 황간땅이고 서쪽은 김산땅이 었다. 김산땅에 장씨 성의 큰 부자가 있어 동세가 떨쳤다 하고 그 다리를 장가 다리라 한 것이 변해서 장계다리가 되었다 한다.

직지사

아도 화상이 선산에 도리사를 짓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좋은 절터가 있다 하므로 제자들이 이곳에 절을 지어 직지사라 했다 한다.

직지사 금강문

옛날 떠돌이 승려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경남 합천 어느 곳에 도착하였는데, 그 마을은 예로부터 대처승 마을로 촌장이 그를 보는 순간 사람 됨됨이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 사위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비구승이라며 한사코 결혼하기를 반대했으나, 바랑과 승복을 빼앗고 강제로 결혼시킨 뒤 신랑 승려가 도망칠까 봐 장삼과 바랑을 깊숙이 숨겨 두었다. 아들을 낳고 살기를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는 장삼과 벼랑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더니, 다음날 아침 부인이 눈을 뜨자 옆자리엔 남편이 없었다. 그 후 부인은 남편을 찾아 전국의 사찰을 모조리 찾아 다녔으나 헛탕이었는데, 어디선가 그와 비슷한 승려가 직지사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그가 장계다리 아래 방앗간집에 묵고 있음을 알고 그 집에서 기다렸으나 사흘이 넘도록 오지않으므로 남편을 찾아 직지사로 들어가다가 일주문을 지나 지금의 금강문 자리에 이르러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다. 그후 매년 부인이 죽은 날이 되면 직지사의 승려들이 누가 부른 듯이 쫓아 나가 부인이 죽은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이에 직지사에선 부인의 원귀를 위로하고자 그 옆에 사당을 짓고 그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매년 제사를 올렸다. 어느 해 이름있는 고승이 찾아와 사찰 안에 사당이 웬말이냐고 나무라니, 승려들은 사당을 세우게 된 사유를 얘기했던 바 , "그러면 이곳에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로 하여금 여인의 원혼을 막도록 하라." 고 하여 지금의 금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직지사 호랑이꿈

황악산 직지사 아래 마을에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호랑이 잡는 일을 계속해 왔는데, 하루는 함정을 파고 덫을 놓아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았다. 그 뒤에 아들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땅에 넘어지더니 한참 있다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웬 사람이 나타나 내 등을 심히 매질하면서 '왜 내 말을 죽였나' 하더라." 고 말하였다. 아들이 매 맞았다는 곳이 자꾸 헐어 터지고, 그 아들은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 장생은 그 후부터는 다시는 함정을 파서 호랑이 잡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살미기

운수 골짜기 중간지점 운수 2리 마을 동남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목 매어 죽은 사람이 많아 '사람 죽이는 나무( 殺木)'라고 한 것이 변하여 살미기가 됐다고 한다.

장수바위

대항면 복전 2리의 들 가운데 돌무지가 있는데 이 돌무지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나막신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옛날 이곳에는 승려들이 많이 다니던 길이 있었는데 어느날 이곳을 지나던 승려 하나가 발이 땅에 붙은 듯 꼼짝 못하고 서 있자 당시 충주박씨 집안에 힘이 센 장사가 있어서 승려의 팔을 잡아 당기며 힘을 준 곳에 박 장사의 발자국이 새겨 졌다고 한다. 이곳을 '넘바우' 혹은 '장수바우'라고 부른다.

매계(梅溪)의 점괘(占卦)

대항면 복전2리(말개미) 마암산에 봉산면 봉계 출신으로 조선 성종시대의 대학자이자 문신(文臣)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의 무덤이 있는데 1504년(연산군10년) 갑자사화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입었다. 매계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4년)가 일어나기 전에 명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갔다가 돌아오던중 요동땅에서 유자광등이 일으킨 사화(史禍)에 대한 국내소식을 듣고 신변을 염려하여 함께 수행한 동생인 효강공(孝康公)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추원결(鄒元潔)이라는 유명한 점술가에게 점(占)을 쳤더니 아무 말없이 "千層浪裡飜身出, 也須岩下宿三宵(천층랑리번신출, 야수암하숙삼소)" 라는 글귀만 써주었는데 앞구절은 "깊은 물속에서 몸을 뛰쳐 나온다"하는 뜻으로 화를 면할수도 있을 것 같으나, "모름지기 바위 아래서 3일을 자리라" 하는 뒷구절의 뜻을 몰랐으나 뒷날 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이 순천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은 그 이듬해에 부관참시를 당해 시신을 무덤 밖 바위 아래에 3일동안 흐트려 놓은 일이 있은 뒤에서야 그 점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송(細松)

임진란 당시 왜군은 이여송(李如松)을 두려워한 나머지 송자(松字) 붙은 곳은 피했다 하여 이곳 세송은 자연히 피난처가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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