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아포읍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고장 아포읍

지명유래

옛 기록에 의하면 삼한시대 아포가 반란을 일으켜 감문국이 군사 30명을 동원하여 토벌작전에 나섰으나 감천에 홍수가 범람하여 회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포가 신라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牙浦叛大發兵三十人夜渡甘川水見水漲而退).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의 문곡. 미한. 봉명. 황소. 신촌 공쌍. 구암. 명례. 보신. 송변. 양산동 11개동과 동면의 대동. 동신. 작동. 마암. 덕계. 동촌. 남촌. 아야. 칠산. 숭산. 상송. 금계. 회성. 대증. 신기동 15개동의 2개면의 행정구역을 합하여 김천군 아포면으로 1914년에 고치고, 아포면 사무소는 문곡동(인 2리)에 있었으나. 1916년 이를 없애고 면 중앙지점인 국사동(阿也)으로 옮겼다. 또한 이동을 인동. 의동. 예동. 지동. 대신. 봉산. 제석. 국사. 송천. 대성동의 10개동으로 개편하였고, 1958년 4월 16일 교통이 편리한 국사 2리 126 - 1번지로 현청사를 옮겼다. 아포가 도시 형태를 갖추게 되고 인구가 늘자(1994년 9,005명) 1995년에 읍으로 승격했다.

남서부에 있는 봉우산(340m)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구릉 야산지가 이루어지고, 동남부는 효자봉(561m)을 중심으로 제석봉(512m). 국사봉(480m)등 높은 산맥이 남쪽을 가리고, 감천이 동서쪽으로 길게 흐르면서 그 옆은 비옥한 외송. 역들. 원창. 제석. 포평의 넓은 들판이 펼쳐져 김천 제일의 농업지대로 경지율 37%, 논과 밭의 비율은 69 : 31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읍의 가운데로는 철도와 고속도로, 514번선 지방도로(김천 - 구미)가 동서로 나란히 지나고, 그 밖에 아포와 선산 사이의 도로와 아포와 감문면 사이의 도로가 동쪽과 중앙지대에서 남북으로 나란하게 지나는 농업 위주의 곡창 지대이다. 최근에는 인삼을 많이 재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이나 제반 자연환경이 좋은 고장이다.

옛날 금릉군 동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구미시 선주동, 동북쪽으로 구미시 고아읍과 경계를 이루고, 서북쪽은 감천을 경계로 감문면과 개령면이 접하며, 서남쪽으로 남면과 사이하고 있다.

아포의 아(牙)가 앞에서도 일렀듯이 아- 엄의 걸림을 보인다. 마침내 어무 - 엄- 아 - 금(今) -감(甘)이라는 대응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로 보면 아포는 감천내의 파생천으로 보인다.

인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 미환리라고 불렀다. 1914년에 미환. 문곡. 야 동. 봉명. 황소동을 합하여 김천군 아포면 인동으로 고쳤다. 1917년에 미하동을 인 1동으로,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아포읍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km 떨어진 언덕지대인데 95%가 과수원이며, 마을 전역이 황토질이다.

동쪽은 언덕으로 인 2리와 접하고, 서쪽도 구릉지대이나 400m를 지나면 넓은 원창평야가 있다. 남쪽은 마을 앞에 저수지가 있고, 가까이에 국사리와 접하고 북쪽은 야산으로 이어지면서 의 1리와 인접한다. 마을의 1km남쪽에 경부고속도로와 514번 선(김천 - 구미간) 지방도로가 동서로 지나가고 있다. 아포읍과 감문면 사이 도로가 남북으로 관통되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살꼬지. 미곶. 미환
    • 약 600년 전 김천가라는 사람이 살 자리를 이곳에 정하였는데 해마다 흉년이 들어 식량이 없고, 쌀이라곤 실에 꿰어 놓을 정도로 귀하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을 살꼬지. 미곶. 미환이라고 부른게 되었다 한다.
  • 문곡(文谷). 연실(蓮室)
    • 약 1700년 전 화순최씨가 원래 인근 야 동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서당을 차려 문곡이라 불렀고 또 마을 옆에 연못이 있어서 해마다 연꽃이 만발하여 그 열매가 볼만하므로 마을 이름을 연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볼밋골. 야 동(冶洞)
    •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성씨. 화순최씨.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뒷산이 불무처럼 생겼다 하여 불밋골 또는 야 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인삼 재배에 성공하여 이 마을의 소득을 높이고 있다. 표준말로는 풀무라 하는바 불과 물을 줄여서 불무 혹은 풀무로 굳어진 형태이다.
  • 연모산. 연지(蓮地)
    • 약 1700년 전 화순최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주위는 구릉산지로 둘러싸여 있는데 연못과 산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연모산 또는 연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봉명
    • 약 1700년 전 인동장씨 9대조가 이곳에 정착할 때, 뒷산 불상곡에서 봉황새가 울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봉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의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에 속한 신촌. 공쌍동이라 하였다. 1914년에 신촌. 공쌍동을 합하여 김천군 아포면 의동이라 고쳤다. 1971년에 신촌을 의1동으로 나누었다.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쳐 불렀다.

면 소재지에서 아포. 감문간 도로 북쪽 2km 어름에 자리하고, 동쪽은 인동 야산 구릉지이며, 남쪽은 제석평야에 이어 연봉천을 동쪽 경계로 하며 서쪽으로 봉산동. 역들평야 동쪽으로 이 마을 원창평야와 3평야가 연결되어 군내 제일의 평야지대이며, 감천이 서동쪽으로 흐르고 냇가에 이루어진 평야는 김천의 기름진 곡창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신촌(新村)
    • 약 300년 전 곽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할 당시는 3집이 살고 있었는데, 한 집 단위로 한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3집을 합하여 새로운 마을이란 의미로 신촌이라 칭하였다. 1979년도에 자립 마을이 되었으며, 아포면 우수 새마을로 지정되었다.
  • 공쌍(公雙)
    • 약 300년 전 중국에서 온 장씨와 곽씨 두 씨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과거를 보아 장씨. 곽씨 두 분이 모두 급제하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공쌍이라 불렀다 한다. 1979년도에 자립 마을이 되었으며, 아포면 우수 새마을로 지정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예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 구암. 지사. 신기. 명례. 서당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암. 지사. 신기. 명례. 서당을 합하여 김천군 아포면 예동이라 고쳤다. 1971년에 구암. 지사. 신기동을 예 1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5km 어름에 동북간으로 구미시 고아읍과 경계를 이룬 읍 끝 마을로 야산 구릉지대라 밭이 논보다 많고 가뭄이 심한 고장이다.

동서남북 사방이 구릉지와 전답으로 마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인데, 아포와 선산간의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구암(龜岩)
    • 옛날 이곳에 거북 등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구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식수가 나지 않아서 고생을 하고 있는 터에 지나가는 대사가 가리키는 곳을 파니, 식수가 많이 났다고 한다. 그 전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 마릇절. 지사(旨寺)
    • 옛날 이곳을 지나가던 대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어 절을 짓게 했다 하여 이 마을을 지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명례골. 예동(禮洞)
    • 옛날에 청주한씨. 동래정씨가 살았는데, 서당이란 마을에서 배운 서생들이 예의에 밝아졌다 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을 명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서당(書當)
    • 약 500년 전 이곳에 서원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서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때 개령현에 속해 있을 때, 개령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원촌이라 불러 온 적도 있다 고 하며, 이곳에 옥터도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낮에는 연기로써 밤에는 횃불로써 정보를 전달해 왔다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지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아포면 보신리와 송변리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보신. 송변. 양산리를 합하여 김천군 아포면 지동이라 개칭하였다가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지 1리 북쪽은 감문면과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 서동쪽으로 가로 흐르고, 감천변안에 넓 은 보평평야 지대인 보신리. 송변리로 이루어진다. 면 소재지에서 2.2km 북쪽에 있는데, 송변리와 보신리는 마을이 커져 한 마을로 되었다. 동쪽은 마을 앞을 백모천이 흘러 예 1리(구암)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보평들에 있는 지 2리(양산)와 인접하고, 남쪽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인 4리(황소)와 인접하며 북쪽은 정녹골을 지나 예 2리(명례)와 이웃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고삽. 보섭. 보신(甫新). 송변(松邊)
    • 조선 숙종 때 김해김씨 김우인이 김산 하로로부터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보평들 앞의 새마을이란 뜻으로 보신이라 불렀다 한다. 그 후 영조 때 예천박씨가 선산 연흥으로부터 들 어와 또 다른 마을을 이루고, 마을 밖에 송림이 울창하다 하여 송변이라 불렀다 한다. 점차 마을이 커지면서 보신과 송변이 한 마을이 되자 합쳐서 지동이라 불렀으며 고삽으로도 통용되고 있다. 고삽이란 말은 전에 보섭이란 명칭의 발음이 바뀌어진 것이라고 한다.
  • 양산(梁山)
    •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에 밀양박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고, 또 약 200년전엔 벽씨가 이주해 왔는데, 벽씨 문중에는 효자들이 많이 나와 효성을 기리는 의미에서 동리 어귀에 벽씨의 효자비가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글자가 마멸된 형체만 산기슭에 묻혀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31가구에 150여명이 살고 있다.
  • 강정골. 강호
    • 마을 앞에 큰 호수가 있었고 뒤로 감천이 흐른다 하여 강정골이라 불렀는데 소리가 변하여 강정골 또는 강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감천을 사이에 두고 배시내 마을과 접하고 있는데 겨울철에 설치하는 나무다리 가교가 이 마을에서 김천과 선산으로 통하는 유일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신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동면 대동(한골)이었으나, 1914년에 대동과 동신동을 합하여 대신동으로 개칭하고 동면을 폐합하여 아포면 소관이 되었다. 같은 해 경부선 철도개통으로 대신역이 신설, 가구 증가로 2개동으로 분동되고, 1935년 대신 1동에서 또 한동이 분리됨으로써 역전이 2동, 동신이 3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대신 1리는 아포면 서쪽 끝 부락으로 동쪽은 건영산, 남쪽은 봉화산을 경계로 남면 봉천리(천동)과 초곡 1리, 서쪽은 덕산을 경계로 초곡 2리(서원), 북쪽은 개령면 서부리와 서동류하는 감천이 면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감천 하안에 외송(바실)평야와 대동지, 못밑들(평야)과 마을 주변 산지하에는 전지가 산재해서 영농상 전답이 고루 형성되어 있다. 부락 북편에 경부선 철도와 김천 - 구미간 지방도 및 경부고속도로등이 동서로 관련되어 교통상으로 편리하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함골. 대동(大洞)
    • 조선 말엽 개령군 동면에 속해 있었으며 개령초등학교 뒷산은 굶주린 호랑이가 개를 잡아 먹으려고 움추린 형상이며, 현재의 대신 2동 앞산은 개가 앉아 있는 형상인데, 개를 잡아 먹으려는 범을 잡기 위하여 함정을 파놓았다 하여 이 마을을 함골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현재의 대신 1동을 대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역전(驛前)
    • 함골. 대동에 속해 오다가 일제 때에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자 마을이 분리되었는데, 역이 있기 때문에 역전동이라고 불렀으나, 1920년에 대신 2동으로 나누어졌다.
  • 시내이. 동신(東新)
    • 파평윤씨가 신행이란 곳에서 처음 마을을 개척하여 살아왔으나 주민들의 성품이 사납고 알력이 심하여 부락터가 거세다고 현재의 마을로 이주하여 새 부락의 마을이름을 동신이라고 불렀다. 시내이란 말은 파평윤씨가 현재의 마을로 이주한 후에도 예전에 살았던 곳의 지명인 신행이를 그대로 따와서 계속 사용해 왔는데, 신행이의 발음이 바뀌어서 시내이로 되었다고 한다. 대신이라는 말도 대동과 신행이의 각 머리 글자를 따와서 대신이라고 했으며, 마을이 생긴지는 약 400년 쯤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봉산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동면 마암리라 칭하였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암. 작동. 덕계리를 통합하여 김천군 봉산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71년에 마암리를 봉산 1동으로 나누었는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봉산 1리는 면소재에서 서쪽으로 3km 지점에 위치한 동향 부락으로 서쪽에 비봉산이 마을 뒤인 서쪽만을 가로막았을 뿐 삼면은 평야가 전개되었고, 연봉천이 마을앞을 남북으로 가로 흐르며 봉산들. 원청들로 이어진다. 마을 북쪽으로는 철도와 고속도로. 지방도로가 동서로 나란히 지나가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말바우. 마암(馬岩)
    • 손씨 2가구가 약 20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마을 뒤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생김새가 말을 닮았다 하여 말바우.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창벌의 머리 마을이며 경부 철로가 바로 이 마을 옆을 지나고 있다.
    • 우리의 지명 가운데에는 말과 걸림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기원적으로 우리민족이 말을 타던 기마민족인 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말을 거룩한 짐승으로 보아 말이 있는 곳에는 지도자가 있었던 것으로 표상하였다.
  • 까치골. 작동(鵲洞)
    • 약 300년 전에 신씨와 조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마을 뒷산이 까치가 앉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까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개령현 동면사무소가 있었던 마을이며 지금은 작동이라 부르고 있다.
  • 새터. 새마을
    • 1936년 병자년 수해로 인하여 작동에서 살던 김경술이 이곳에 이주하여 처음 정착하였으며 2년 후 김해김씨가 이주하면서 새터. 새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인근 주민들이 편입 이주하여 마을이 더욱 번성하게 되었으며, 사과. 포도 등 과수 재배가 성하다.
  • 초산동(草山洞)
    • 1969년 경부고속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된 작동 주민 나채성 외 5가구가 이곳에 이주하였으며, 주위에 풀이 많아 이름을 초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취락동(聚落洞)
    • 작동 주민 19가구가 경부고속도로 접도구역내의 불량 건물로 지적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7년에 이전 건축한 마을인데, 취락동이라 이름지었다.
  • 덕계(德溪)
    • 마을의 개척 역사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논농사를 주로 하는 이 마을의 수원이 되었던 바 이 마을을 덕되게 하는 내라 하여 덕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감천을 옆에 끼고 있는 이 마을 앞의 원청벌은 김천에서 쌀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 덕계의 덕(德)은 본디 크다는 뜻으로 큰 내 혹은 큰 개울이라는 의미로 보면 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제석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동면에 속한 동촌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에 동촌. 남촌을 통합하여, 이 마을 뒤산 제석봉 이름을 따서 김천군 제석동으로 고쳤다. 1971년에 동촌을 금릉군 제석 1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93년 1월 1일 금릉군 조례 1313호로 취락동인 진동이 제석 3리로 분리되어 나갔다. 제석동은 1, 2리로 분동은 되었으나, 이어진 마을이며, 동남쪽이 제석봉(512m)과 국사봉(480m) 의 동쪽 산 너머 대성동과, 남쪽은 남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동은 산지구릉으로 국사리, 서쪽은 연봉천과 하안평야 지대로 봉산리와 접하고, 북쪽은 제석평야와 철도, 514호선 지방도로가 동서로 횡단하고 있으나, 의 1리 원창평야와도 연결된 광활한 평야와 약간의 구릉지가 있는 큰 부락으로서 비옥한 농지를 가져, 쌀과 과일이 많이 생산되며, 교통이 편리하고 구미 공단이 가까워 차츰 근로소득이 높아지고 있는 마을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동촌(東村)
    • 약 400년 전 반남박씨가 성주에서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하고 약 50여 가구가 돌성을 쌓아 성문을 두고 살았는데, 동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박씨네가 살았다 하여 박샘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오고미. 오금리(烏金里). 남촌(南村)
    • 약 400년 전 진주에서 정씨가 이주하여 정착할 당시에 마을 뒷산에 금까마귀가 앉았다 하여 오금리라고 불렀다 한다.
  • 진등
    • 옛날에 이곳이 긴 비탈진 고개였다 하여 마을 이름을 진등이라 불렀다 한다. 1979년 경부고속도로 변의 주택 정비 계획에 따라 제석동의 24가구를 이주하게 하여 마을을 형성하게 하였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국사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동면에 속한 아야리라 하였으며, 1914년 아야. 칠산을 통합하여 김천군 아포면 국사동이라 개칭하고 면사무소도 아포면 문곡동(연실)에서 국사동으로 옮겼다. 1936년에 경부선 철도의 아포역이 신설되므로 역전 마을이 새로 이루어져 점차 발전되었고 1958년에 또 면사무소를 국사 2동으로 옮겼다. 1971년에 아야. 국사를 국사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읍 사무소가 있는 국사리는 동남간쪽인 뒷산에 국사봉(관리봉 480m)이 가로 막힌 북향부 락으로 동서로는 구릉지로 전지가 대부분이고, 북쪽인 앞은 경부선 철도와 514호선 지방도 (김천 -구미) 및 경부고속도로가 나란히 동서로 지나가고 있으며, 이 세길 넘어 국사 3리쪽 에 논이 흩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제석 1리, 국사 3리 고리와 인 1리가 북쪽 동 경계로 형성 되어 있다. 영월신씨와 김해김씨의 집성촌이다.

제석은 하늘의 신을 뜻하기도 하는 바, 이와 국사를 고리 지으면 국사 - 천신이란 말이 된다. 때로 국사 - 구스 - 굿으로 대응됨을 보면 하늘에 굿을 하여 빌었던 이름의 잔재가 아닌가 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애기. 아야(阿也)
    • 원래 마을의 위치는 현재의 마을 등 넘어 독골이란 곳에 있었는데, 수재로 폐동되고, 약 300 여년 전에 현재의 마을의 부자인 서씨 댁에 신득남이란 사람이 머슴살이를 하다가 그 집 사위가 되어 팔 형제를 두었고 신득남의 후손 팔 형제가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 칠산(七山)
    •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 주위에 앞산. 뒷산. 당산. 안산. 비석등. 아랫진등. 웃진등 7개의 조그만한 산들이 있는데, 이 7개의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칠산이라고 부르 게 되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능치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동면에 속한 숭산리인데, 1914년에 상송리, 금천리와 통합하여 송천동이라 하고, 1971년에 숭산리와 금천을 함께 분리하여 송천 1동이라 하고 1988년에 동을 리로 되돌렸다. 숭산에는 일찍이 선산금씨. 남양홍씨가 모여 살았고, 금천에는 은진송씨. 밀양박씨가 모여 살아왔다.

아포읍의 동단인 숭산. 금천 두 마을은 구미시와 구미시 고아읍과 시군 경계를 이루는 야산 구릉과 평야이고, 남쪽은 김천 뒤 천선태산과 국사봉으로 이어져서 가로막히고 서쪽은 금계 마을을 접한 평야와 구릉지와 아포역까지 연속되었고, 북쪽은 이웃 상. 하송 두 마을과 소산으로 둘러싸이고 중앙지는 경부선 철도와 514번 지방도(김천 - 구미간) 및 경부고속도로가 동서로 병행 관통되어 농지가 적은 편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숭산(崇山)
    • 분지 마을로 주위가 산이 많고 지형이 웅장하고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숭산이라 고 불렀다 한다. 옛날 김첨지란 장수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마을 오리밖의 도둑을 보고 활을 쏘아 적중시켰다 한다. 현재 김첨지 후손의 자취로선 몇 기의 고분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을 뿐, 그 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경기도 이천에서 홍석양이란 선비가 이주해 왔고, 또 약 300년전엔 강릉유씨와 선산김씨가 이주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 쇠내. 금천(金川)
    • 원래 마을 이름은 쇠내였는데 왜 쇠내라 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금천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의 뒷산으로 통하는 산길 소로는 대못 낚시꾼과 대성동 주민들의 유일한 교통로이기도 한다. 김정호 선생의 지리서를 보면 쇠 - 새의 대응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로 보면 새로난 냇물이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웃송내. 상송(上松)
    • 상송천의 천자를 줄여서 보통 상송이라고 부르며, 웃송내라고도 한다. 원래 송천동이란 명칭은 상송과 금천의 이름을 따서 송천동이라 했다 하며, 마을 뒷산의 능선이 구릉으로 되어 있는데 선산군과의 경계이며, 송내 고개는 아포 지역에서 옛 선산장과 안계장으로 통하는 최단의 교통로로 알려져 있다.
  • 아랫송내. 하송(下松)
    • 아랫송내는 아랫마을 송내라는 뜻으로 천자가 줄어서 하송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웃송내. 상송과 아랫송내. 하송을 합쳐서 송내. 송천이라 부르고 있다.
  • 금계(金鷄)
    • 마을 뒷산의 지형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금계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앞이 개방되어 있으면 폐동이 된다는 설이 있으므로 약 300년 전 마을 앞 개인 소유의 땅을 동네 주민들이 공동으로 매입하고, 그곳에 송림을 조성하여 개방됨을 막았는데, 현재에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한다.
  • 대지(大池)
    • 마을 앞에 한지란 큰 못이 있는데, 큰 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네 이름을 대지라고 불렀 다 한다. 대지. 한못은 아포읍 중심지에 위치하며, 원래 택지로서 국사봉. 효자봉의 정기를 이어 받은 명당자리라 한다.(전설참조)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성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동면 회성리라 하였으며, 1914년 회성. 신기. 대증동을 통합하여 김천군 아포면 대성동으로 고쳤다. 1971년 회성동(상회리, 하회리)을 대성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88년에 동을 리로 고쳤다. 대성 1리는 아포읍 동남쪽 끝 마을로 면소재지에서 5km 떨어 진 국사봉 지맥에서 동쪽(금천뒷산) 고개 넘어 산간 오지에 자리하고, 동으로 대성 저수지가 구미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국사봉(480m)과 제석봉(512m) 연봉으로 막히고 북쪽 역시 서쪽으로 둘러싸여 사방이 산인 오지 마을로 농지가 협소한 편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윗회성. 상회성. 회성(會聖). 효성. 서회성
    • 약 380년 전 임진란 당시 죽산김씨. 밀양박씨. 대망강씨 등이 피란와서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산수가 좋고 일기가 온화하여 주위에서 많은 선비가 모여 수련하고, 성인의 왕래가 많으므로 회성이라 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대진. 대증(大增)
    • 약 370년 경 난을 피하기 위해 밀양박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고, 마을 앞에 큰 내 가 있으며, 그 곳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하여 대진이라 불렀다 한다.
  • 새터. 신기
    • 약 50년 전 밀양박씨가 온천동이라는 곳에서 이주하여 새마을을 개척하여 새터. 신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성못 공사로 인하여 수몰지역이 된 마을 사람들이 일부 이 곳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 자거랏. 자거래. 신기
    • 마을 주변에 자갈이 많다고 하여 처음에는 자갈터라고 불리어져 내려오다가 나중에는 자거랏으로 칭하여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대성못 개발 공사로 인하여 수몰지구로 변하여 현재 못이 되고 말았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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